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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교회’와 ‘목사 교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아니라 세상의 속된 복을 구하는 비루한 욕망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세인들뿐만 아니라 교인들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거센 지탄을 받고 있는 한국 교회, 그리고 한인 교회가 하나님과 세상으로부터 사랑받는 건강한 교회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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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5-26 11:17
온전한 사람
 글쓴이 : 라이트하우스
조회 : 147  

온전한 사람
골1:24-29
(2019/05/26, 부활절 제6주, 웨슬리 회심 기념주일)

음성으로 듣기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분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워가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남김없이 전파하게 하시려고 내게 맡기신 사명을 따라,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이 비밀은 영원 전부터 모든 세대에게 감추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그 성도들에게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 가운데 나타난 이 비밀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성도들에게 알리려고 하셨습니다. 이 비밀은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요, 곧 영광의 소망입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기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권하며,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칩니다. 이 일을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작용하는 그분의 활력을 따라 수고하며 애쓰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변하면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감리교회 운동을 시작한 존 웨슬리의 회심 281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오랫동안 감리교회에 다닌 분들은 1738년 5월 24일이라는 일자를 기억할 겁니다. 웨슬리의 일기를 통해 우리는 그날 그의 심령 속에서 벌어진 사건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녁에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은 채 올더스게이트 가에서 있는 어느 모임에 갔는데 거기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의 서문을 읽고 있었다. 9시 15분 전쯤 되어서 그가 계속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역사를 하신다고 설명을 하고 있었는데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믿는다고 느꼈다. 뿐만 아니라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씻으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생겼다.“

감리교회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라는 구절을 근거로 하여 이 날을 웨슬리의 회심일로 기념합니다. 그 뜨거움은 불처럼 뜨거운 체험이 아니라 마음에 일어난 변화와 관련됩니다. 그는 처음으로 인간의 죄를 씻으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시는 주님의 은총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은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시간의 분기점이었습니다. 이후의 그의 삶은 이 체험의 의미를 확인하고, 가슴의 깨달음을 손과 발의 실천으로 바꾸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는 개인적 성화는 물론이고 사회적 성화를 이루기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웨슬리가 경험했던 그 변화의 순간은 진리를 찾기 위해 치열하게 모색하고 고심했던 시간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줄탁동시啐琢同時라는 말을 아시지요? 새가 부화하기 위해서는 안에서 껍질을 쪼는 새끼의 노력과 그 기척을 알아차린 어미가 밖에서 껍질을 쪼아주는 일이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웨슬리의 회심은 하나님 안에서 바르게 살아가려는 치열한 노력,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에 대한 처절한 자각과 하나님의 은총이 적시에 만나 일으킨 사건이었습니다.

이날 이후 웨슬리는 굳어진 영국교회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습니다. 그 새로움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람들은 그를 교회 밖으로 내쳤고, 웨슬리는 내쳐진 그 낮은 자리 곧 변방에서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기 위해 헌신했습니다. 화려한 건물, 장엄한 교회 음악,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있는 교회당이 아니라, 밑바닥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그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세계는 나의 교구’라는 말은 바로 그런 사정을 일컫는 말입니다. 감리교회는 그렇게 탄생했고 감리교 운동은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타락의 수렁으로 빠져들던 영국 사회를 정화했습니다. 한 사람의 변화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단초가 되는 법입니다. 인간은 누구도 하나님의 시간을 계산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때는 무르익고 있습니다. 우리가 온 세상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맥을 놓고 있으면 안 됩니다.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주님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십니다.

∙사서 고생하는 사람
헤더 모리스의 장편소설인 <아우슈비츠의 문신가>는 나치의 수용소에서 사람들의 팔에 숫자 문신을 새기는 업무를 수행해야 했던 랄레라는 인물의 삶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실화에 바탕을 둔 그 소설에 나오는 한 장면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랄레는 아름다운 어느 봄날 커다란 포장 트럭 한 대가 행정동 뒤편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그는 그 트럭을 따라갔다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합니다. 발가벗은 사내 수십 명이 트럭에서 내려 승합차에 태워졌습니다. 차 문이 닫히자 친위대 장교 한 명이 손에 산탄통을 들고 차 지붕으로 올라가서 작은 들창문을 열고는 거기에 뭔가를 쏟아 넣은 후 걸쇠를 걸었습니다. 그러자 차체가 심하게 흔들렸고 아득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한참 후 승합차가 잠잠해지자 군인들이 문을 열었고 죽은 사내들이 돌덩이처럼 쏟아져 내렸습니다.

랄레는 털썩 무릎을 꿇고 속을 다 게웠습니다. 다음 날 아침, 지옥을 본 탓인지 랄레는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졌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그는 여러 날이 지난 후 깨어났습니다. 그가 용광로에서 태워지지 않고 그때까지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친구 아론이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몰래 숨겨주었던 것입니다. 아론은 “하나를 구하는 것이 세상을 구하는 길”이라고 믿던 사람입니다. 아론이 중간에 어딘가로 끌려가자 다른 이들이 랄레를 돌봐주었습니다.

“우린 아론이 시작한 일을 이어받은 거야. 그 하나를 구할 수 있는지 궁금했거든.“(헤더 모리스, <아우슈비츠의 문신가>, 박아람 옮김, 북로드, 2019년 5월 3일, p.55)

그들은 돌아가면서 몰래 물을 가져오고 빵을 먹이면서 랄레가 깨어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일어난 그런 사랑의 기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인간이지 야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습니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위험을 무릅쓸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멀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달라지면 세상도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집단으로 대한 적이 없으십니다. 자기 앞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한 사람으로 대하셨습니다. 집단은 추상적 실체이지만 개인은 구체적인 존재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만난 이들은 다 변화되었고, 그들은 다른 이들을 사랑의 강물로 끌어들였습니다. 그 강이 바닥을 드러내지 않고 유유히 흐르려면 다른 이들을 귀한 존재로 여기는 이들의 헌신과 사랑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삶을 이런 말로 요약합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분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워가고 있습니다.“(골1:24)

그리스도를 만난 후 바울은 더 이상 안일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사서 고생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의 자녀 여러분, 나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갈4:19). 바울은 다른 이들 속에 있는 거룩한 존재, 아름다운 영혼을 이끌어내는 것을 자기 삶의 소명으로 여겼습니다. 그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기를 위해 몸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얼의 골짜기
바울은 이방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그리스도를 그는 영광의 소망이라고 표현합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얼굴’이라는 시에서 “이 세상 뭘 하러 왔던고?/얼굴 하나 보러 왔지/참 얼굴 하나 보고 가잠이/우리 삶이지”라고 노래했습니다. 함석헌의 스승인 다석 유영모 선생은 얼굴을 가리켜 ‘얼의 골짜기’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꽃처럼 예뻐도 얼이 빠진 얼굴도 있고, 못 생겼어도 기품과 서늘한 정신이 깃든 얼굴도 있습니다. 참 얼굴과 만나야 우리 얼굴도 깊고 맑아집니다.

엊그제 점심을 먹으며 목회자들이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어느 연예인이 공항검색대에서 곤경을 당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등록된 얼굴 사진과 실물에 차이가 많았던가 봅니다. 의아해하는 직원에게 그가 영어 단어 하나를 툭 던지자 그는 웃음 띤 얼굴로 통과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리모델링’. 얼굴 모양은 바꿀 수 있지만 깊이와 품격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보고 싶은 그 얼굴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 얼굴만 보면 세상을 잊고,/그 얼굴만 보면 나를 잊고,/시간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밥을 먹었는지 아니 먹었는지 모르는 얼굴,/그 얼굴만 대하면 키가 하늘에 닿는 듯하고,/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애,/남을 위해 주고 싶은 맘 파도처럼 일어나고,/가슴이 그저 시원한,/그저 마주앉아 바라만 보고 싶은“.

예수님의 얼굴이야말로 바로 그런 얼굴이 아니겠습니까? 그 얼굴과 참으로 만난다면 그 얼굴을 닮게 마련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란 하나님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존재여야 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름이 꽤 알려진 목사가 설교 중에 한 말에 많은 이들이 아연실색하고 있습니다. 그는 남북문제는 한국 사람들 2천만 명이 북한 사람들을 하나씩 껴안고 죽으면 된다면서, 남은 3천만 명이 아기를 하나씩 낳으면 인구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순전한 농담이라 해도 그 말은 천박하고 폭력적이고 반기독교적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적대감과 증오심을 부추기고, 자기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런 이들과 그들의 말을 즐겁게 듣는 사람들로 인해 수모를 겪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우리를 매우 위험한 세계로 데려갑니다. 경건의 의상을 입은 종교와 정치적인 무례함이 결합할 때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일일이 예로 들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지금 세계는 종교를 빙자한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찢기고 있습니다. 어느 신학자의 말이 우리에게 큰 경종을 울립니다.

“종교는 결합시키기도 하지만 또 그만큼 분열시킨다. 어쩌면 결합시키기보다 분열을 일으키는 경우가 더 많은지도 모른다. 인간의 경건성의 깊은 곳, 인간의 종교성의 핵심에는 다른 이들을 지배하고, 그 힘과 영향력을 확대하고, 인간 영혼을 속박하고 묶어두려는 악마적 힘이 잠복해 있다.”(C. S. Song, , Augsburg Fortress, 1994, p.101)

무서운 말입니다.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지만 괴물로 변한 이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시고, 특정한 사람들을 차별하는 세상과 맞서셨습니다. 담을 세우고, 차별을 공고히 하고, 누군가를 혐오하도록 부추기는 것은 스스로 그리스도와 무관한 존재임을 천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전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를 전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성도들의 분별력이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온전한 사람이라는 목표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은 자기들의 사명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기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권하며,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칩니다”(골1:28). 여기서는 ‘권하다’와 ‘가르치다’라고 두 단어로 번역했지만 원문에서는 ‘선포하다’, ‘경고하다’, ‘가르치다’로 되어 있습니다. 선포, 경고, 가르침의 목표는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온전하다‘(텔레아스, teleios)는 단어는 최종적인 목표에 이르다 혹은 다른 것을 더 보탤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존 웨슬리는 우리가 영적 순례를 통해 마침내 도달해야 할 목표를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이 완전할 수 있는가? 그건 불가능한 목표가 아닌가? 많은 이들이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들의 죄와 욕심을 정당화합니다. 웨슬리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갈2:20)라는 말씀을 예로 들면서, 성도들은 바로 이 고백 위에 자기 삶의 집을 지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고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둔 사람들은 “누구나, 그가 깨끗하신 것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합니다”(요일3:3). 악한 성품과 생각에서 자유함을 얻는 사람이 바로 온전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깨끗‘이라는 말은 ‘깨우침‘의 ‘깨‘와 ‘끝‘의 ‘끗‘으로 풀어 설명합니다. “진짜 깨끗한 건 진리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죄악 세상을 끝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너무 높은 목표 같지만 그 목표를 포기하면 안 됩니다.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닦고 또 닦아야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존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도달하려는 목표를 가슴에 품고 살았기에 끝까지 안주하거나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머리(head)의 깨달음이 가슴(heart)의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가슴의 깨달음이 손(hand)의 실천으로 이어질 때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더러움이 벗겨질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온전한 사람의 길로 인도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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