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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교회’와 ‘목사 교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아니라 세상의 속된 복을 구하는 비루한 욕망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세인들뿐만 아니라 교인들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거센 지탄을 받고 있는 한국 교회, 그리고 한인 교회가 하나님과 세상으로부터 사랑받는 건강한 교회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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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10-20 07:46
서로 받아들이십시오
 글쓴이 : 라이트하우스
조회 : 104  

서로 받아들이십시오
롬15:7-9
(2019/10/20, 창조절 제8주, 야외예배)
음성으로 듣기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이십시오. 내가 말하는 것은 이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드러내시려고 할례를 받은 사람의 종이 되셨으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조상에게 주신 약속들을 확증하시고, 이방 사람들도 긍휼히 여기심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주님께 찬양을 드리며, 주님의 이름을 찬미합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우울한 시대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거룩하신 현존 앞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은 받아들이심입니다. 허물 많고 죄 많은 우리들을 하나님은 내치지 않으시고 받아주셨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구원받음의 체험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정의했습니다. 마치 탕자를 맞아들였던 그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품에 안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받아들여짐의 체험‘은 참 소중합니다. 거칠고 냉랭한 세상에 사느라 우리는 지쳤습니다. 적대적인 시선과 말에 부딪힐 때마다 우리 마음에 멍이 듭니다. 서양에서는 우울함을 ‘푸른 악마‘(blue devil)라고 한답니다. 우울에 빠진 영혼의 핏기 잃은 창백한 모습을 그리기 위한 것이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적대적인 말과 시선으로 인해 가슴에 멍이 많은 사람들일수록 우울감에 많이 시달립니다. 누군가에게 적대적인 사람은 그들의 설 자리를 허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떠밀리다가 결국 벼랑 끝에 서는 이들이 많습니다.

‘설리‘라는 예명을 썼던 ‘최진리’ 씨가 악플과 혐오에 시달리다 세상을 등졌습니다. 드물지 않은 일이지만 당당해 보였던 그의 극단적인 선택에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당함의 이면에 있던 여린 속살이 너무나 큰 상처를 받았기 때문일 겁니다. 실명이든 닉네임이든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고 무정한 말들을 쏟아냅니다. 자기 속에 있는 불만과 욕구를 배설하는 것일 테지만 그것이 다른 이들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폭력이라는 생각은 아예 없는 것 같습니다. 수치심을 자극하고 혐오를 조장하는 말들이 세상을 떠돌고 있습니다. 이전보다 물질은 풍요로워졌지만 정신은 점점 빈곤해진 까닭입니다.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신성보다 권력을, 정신보다 물질을 추구하는 시대’를 가리켜 ‘궁핍한 시대’라 했습니다. 지금은 분명히 궁핍한 시대입니다. 도무지 여유가 없습니다. 타자를 위한 여백을 마련하지 못한 이들이 세상을 떠돌고 있습니다.

∙머뭇거림
믿음의 사람들은 누군가의 설 땅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 많은 우리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이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울은 주인에게서 달아났던 오네시모를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이렇게 부탁합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생각하면, 나를 맞이하듯이 그를 맞아 주십시오”(몬1:17). 받아들임 혹은 맞이함 속에 평화가 있습니다. 그가 나와 사는 방식이나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다 해도 그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할 때 평화가 시작됩니다. 김현경 교수는 환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 또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하여 그를 다시 한 번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가 내 곁에 머물 수 있도록 자리를 내주는 것이 환대의 기본입니다.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씨가 부른 ‘가시나무’라는 노래를 기억하시나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내 속엔 헛된 바람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노랫말이지만 우리 삶의 실상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나’, ‘나의 어둠’, ‘나의 상처’, ‘내 생각’ 등이 다른 이들을 찌르고 밀어내고 있지 않은지요? 다른 이들을 내 방식대로 바꾸어 놓으려 할 때 불화가 생깁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확신이야말로 평화의 적입니다.

며칠 전 어느 법조인과 만난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오랫동안 판사를 지낸 그 분은 법관들이 제일 기피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종교인이고, 둘째는 교수, 그리고 셋째는 자수성가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다른 이들의 말에 좀처럼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 너무들 당당합니다.

시몬느 베이유는 우리가 사랑 가운데서 서로를 대하기 위해 필요한 태도가 있다고 말합니다. ‘머뭇거림(hesitation)‘이 그것입니다. 머뭇거림은 결단성 있게 딱 잘라서 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사람을 대할 때 서슴없이 그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어떤 사람을 깊이 이해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법입니다. 선입견에 따라 사람을 재단하기보다는 판단을 자꾸 유보해야 합니다. 누구든 낯선 곳에 가면 거침없이 행동하지 않습니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행동거지를 바로 하려 애씁니다. 사람을 대하는 것도 그러해야 합니다. 이런 조심스러움이 없어서 세상이 난장판입니다.

교회는 받아들임을 연습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나무 뒤에 숨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그때 아담은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창3:10b)라고 대답합니다. ‘벗음’, ‘두려움’, ‘숨음’, 이 세 단어야말로 시간 속을 바장이는 우리 삶의 실상을 제대로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벗은 몸을 남들에게 드러내기 싫어하는 것처럼 연약함을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에 연약함은 실패의 징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연약한 이들을 사정없이 물어뜯는 세상이기에 우리는 강한 척 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모욕과 수치심에 내몰린 이들은 자꾸 움츠러듭니다. 세상이 그들을 ‘비존재’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을 자꾸 겪다 보면 영문을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마련입니다. 실패, 거절, 버림받음, 인정받지 못함, 질병, 죽음 등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꾸만 자기를 치장하거나 권력 뒤에 숨으려 합니다. 잊혀지거나 밀려나고 싶지 않다는 바람 때문에 사람들은 유명해지려 하거나, 다른 이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노력합니다.

∙선원으로 살다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당시의 세계가 만들어 놓은 사회적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장벽을 허물기 위해 인위적으로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오히려 잔뜩 주눅 들어 사는 이들 곁에 다가가서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느끼게 해주었을 뿐입니다. 우리 마음이 유한한 인간이 겪는 슬픔의 지층까지 내려갈 수 있다면 세상의 모든 고통이 나와 무관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신경림 선생의 시 ‘파장罷場’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너 잘 났느니 나 잘 났느니 따지지 않고 흉허물 없이 어울릴 수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에 가깝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드러내시려고 할례를 받은 사람들의 종이 되셨습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마20:28) 이 마음이 없어 온통 지옥입니다.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은 “내 이름을 이슈마엘이라고 해두자(Call me Ishmael)”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작중인물인 이슈마엘은 지갑에는 거의 돈이 한 푼도 없고 육지에는 흥미를 끌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배를 타게 됐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선원들을 마구 부려먹는 선장도 아니었고, 배삯을 치른 승객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일개 선원으로서 바다에 나간다”(허먼 멜빌, <모비딕>, 김석희 옮김, 작가세계, p.35). 선원은 일하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살 때 비애가 적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섬기는 일에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선장처럼 지시하고, 승객처럼 뭔가를 요구하는 이들이 많아질 때 공동체는 분란 가운데 처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 선원으로 부름 받았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주님이 할례 받은 이들의 종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경험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선물로 주신 분입니다. 어제 이어령 교수께서 인터뷰를 통해 하신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는 지성의 종착점은 영성이라면서, “지성은 자기가 한 것이지만, 영성은 오로지 받았다는 깨달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우리도 주며 살아야 합니다. 일치와 나눔과 섬김의 기쁨으로 사람들을 초대해야 합니다. 우리의 만남을 통해 빚어진 희망과 기쁨을 이웃들에게 전하며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만나는 모든 사람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십시오. 그들이 환대받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만드십시오. 주님은 그런 우리의 실천을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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