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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교회’와 ‘목사 교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아니라 세상의 속된 복을 구하는 비루한 욕망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세인들뿐만 아니라 교인들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거센 지탄을 받고 있는 한국 교회, 그리고 한인 교회가 하나님과 세상으로부터 사랑받는 건강한 교회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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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4-08 14:57
일어나서 가자
 글쓴이 : 라이트하우스
조회 : 237  
 > 영성 > 김기석 설교
일어나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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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04월 05일 (일) 12:39:12 [조회수 :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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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서 가자
막14:32-42
(2020/04/05, 종려주일)
음성으로 듣기

   
 

 [그들은 겟세마네라고 하는 곳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어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예수께서는 매우 놀라며 괴로워하기 시작하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서 깨어 있어라." 그리고서 조금 나아가서 땅에 엎드려 기도하시기를, 될 수만 있으면 이 시간이 자기에게서 비껴가게 해 달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예수께서 다시 떠나가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와서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들은 졸려서 눈을 뜰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할지를 몰랐다. 예수께서 세 번째 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남은 시간을 자고 쉬어라. 그 정도면 넉넉하다. 때가 왔다. 보아라, 인자는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일어나서 가자. 보아라, 나를 넘겨줄 자가 가까이 왔다."]

∙명의이신 주님 앞에
자비로우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종려주일인 오늘 주님께서 느릿느릿 걸어 들어오셔서 우리 마음의 주인이 되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주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높은 것은 낮추고, 구부러진 것은 곧게 하고, 지저분한 것은 다 치워야 합니다. 묵고 또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거미줄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실 마음만 있으면 주님께서 더럽다 아니 오실 리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을 갈망한다 하면서도 정작 주님이 다가오시면 멀찍이 멀어지려 합니다. 안일한 일상이 흔들릴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고질병입니다. 낫기를 원한다 하면서도 명의는 거절하는 격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물론 믿기만 하면 고쳐질 나(I)이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맑아진 내 영혼의 눈동자가, 항상 계시사 모자랄 리 없는 당신의 진리를 겨냥하여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흔히 돌팔이 의원에 덴 사람이 명의에게 몸 맡기기를 두려워하듯이 내 영혼의 건강도 이와 비슷하여 믿지 않고는 나을 수 없는 것을, 거짓을 믿을까 무서워서 낫기를 싫어했으니 신앙의 약을 손수 지으시사 천하의 모든 병에 뿌리시고, 게다가 위력을 붙여주신 당신 손을 마다한 것입니다.”(<고백록> 제6권 4장, 최민순 역)

사순절은 명의이신 주님 앞에 우리의 참상을 아뢰고 치유를 청하는 기간입니다. 돈과 출세와 풍요와 편리와 승리, 그리고 정치적 입장이라는 우상에게 팔렸던 우리 마음을 거두어 주님 앞에 바치면 그만인 것을 우리는 여전히 주님을 외면하면서 찾는 사람이 아닌지요? 그렇기에 오늘 우리는 이 비상한 시기에 주님이 우리 마음에 오셔서 주인이 되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예루살렘 입성
사람들은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승리자의 개선행진으로 받아들이고 싶어하지만, 사실 그것은 죽음을 향한 행진이었습니다. 초라한 주님의 행렬과 대비되는 것은 위엄을 갖춘 로마군대의 행렬이었습니다. 유월절이 되면 로마 총독은 로마 군단을 상징하는 깃발을 앞세운 기병들을 예루살렘에 보냈습니다. 혹시라도 반란이 일어날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 깃발과 기병들은 제국의 위엄과 무서움을 드러냄으로써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로마의 책략이었습니다. 그런 위협적인 행렬을 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에는 더욱 메시아에 대한 갈망이 깊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이들 눈에 다락처럼 높아 보이는(정지용) 말이 아니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느릿느릿 걷는 나귀의 걸음걸이는 평화 시대의 상징입니다. 주님은 전쟁 혹은 누군가를 제거함으로 새로운 시대를 여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드리운 적대감의 장벽들을 허무심으로 평화를 가져오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도 그 행렬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1968년 4월 4일은 마틴 루터 킹 Jr. 목사가 암살당한 날입니다. 그의 죽음을 돌아보다가 몇 해 전 미국의 남부 도시 아틀란타에 갔을 때 들렀던 마틴 루터 킹 Jr. 기념관에서 만났던 글귀가 떠올라 찾아보았습니다. 마침 찍어두었던 사진이 있어서 번역해 보았습니다.

“몽고메리로부터 멤피스에 이르기까지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인권과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한 행진에 참여하도록 사람들을 독려하기 위해 행렬의 선두에 서서 용감하게 걸어나갔다. 에벤에셀 침례교회의 강대상에서, 링컨 기념관의 계단에서 킹 박사는 권리를 박탈당한 이들과 짓밟힌 이들의 꿈과 소망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되었다. 킹은 모든 사람에게 기본적인 인권이 부여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모두가 다 존엄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의 종교 전통과 간디의 비폭력 저항이 결합된 이런 원칙은 인종 차별, 가난, 불공정한 노동 현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 대한 킹의 ‘현실주의적 평화주의’의 밑절미가 되었다.”

안전하기 때문에 혹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일임을 알기에 그는 위험 속으로 기꺼이 들어갔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 되었습니다.

∙번민하시는 예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로 잘 알려진 부분입니다. 겟세마네는 ‘기름 짜는 곳’을 뜻합니다. 기드론 시내를 사이에 두고 예루살렘을 마주보는 곳에 있습니다. 주님이 성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곤 하셨던 곳으로 올리브나무 숲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조금 더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 날의 광경을 회상하며 마가는 “예수께서는 매우 놀라며 괴로워하기 시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가 사용한 ‘놀라다’와 ‘괴로워하다’라는 단어는 우리를 당혹케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언제나 당당하게 도전에 맞서시던 주님이 비틀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 말입니다. ‘놀라다’라고 번역된 엑탐베오ekthambeo는 사실 ‘압도되다’ 혹은 ‘놀람에 사로잡히다’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이런 주님의 모습을 우리는 상상하기 싫어합니다. 낯설기 때문입니다. ‘괴로워하다’라고 번역된 아데모네오ademoneo는 ‘무거움에 짓눌리다’라는 뜻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낭만화 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도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죽음이 다가왔을 때 빙긋 웃으며 ‘왔어요, 자 이제 나를 가져가요’라고 말할 분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죽음은 역시 쏘는 가시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평범한 행복을 구합니다. 테겔 형무소에 갇힌 채 죽음의 공포 아래 있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남들이 바라보는 자기 모습과 다른 자기 모습을 인식하며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고 그립고 병약한 나
목 졸린 사람처럼 숨을 쉬려고 버둥거리는 나
빛깔과 꽃, 새소리에 주리고
따스한 말과 따스한 인정에 목말라하는 나
방자함과 사소한 모욕에도 치를 떠는 나
좋은 일을 학수고대하며 서성거리는 나
멀리 있는 벗의 신변을 무력하게 걱정하는 나
기도에도, 생각에도, 일에도 지쳐 멍한 나
풀이 죽어 작별을 준비하는 자”
(디트리히 본회퍼, <옥중서신-저항과 복종>, 김순현 옮김, 복 있는 사람, 2016년, p.334)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뭘까요? 본회퍼는 세상의 명예, 권세, 돈을 말하지 않습니다. 위기의 시간에 그는 오히려 ‘빛깔과 꽃, 새소리’, ‘따스한 말과 따스한 인정’을 그리워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평범한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가장 그리운 것이 됩니다. 그런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처럼 비참한 일이 또 있을까요?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도 평범한 행복을 누리고 싶지 않으셨을까요? 이 마음을 알지 못하면 구원의 신비와 은총의 깊이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명하기 위해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얼마나 괴로웠던지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금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서 깨어 있어라” 하고 부탁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가야 할 길이라면
저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 때문에 실망하기는커녕 가장 깊이 감동합니다. 신학교 1학년, 정말 아무 것도 알지 못하던 때 채플 시간에 저는 이 놀라운 광경과 마음으로 만났습니다. 고난주간 기도회였을 겁니다. 기도회가 진행되는 중에 4학년 선배 한 분이 청아한 테너 목소리로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감람산 깊은 밤중에 별빛은 희미하여라 주 예수 고민하시며 외로이 기도하시네/주 홀로 깊은 밤중에 고민에 싸여 계시나 그 사랑 받던 제자도 스승의 괴롬 모르네” 어쩌면 그날의 채플이, 아니 그 선배의 음성을 통해 들은 그 찬송가가 일평생 제 신앙에 색깔을 입힌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님의 외로움이 제 가슴에 사무쳐 왔습니다. 사랑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승의 괴롬을 모른 채 잠들어 있던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예수님을 외롭게 하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살면서 늘 그렇게 살아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다짐이 제 신앙의 원뿌리 가운데 하나임은 분명합니다. 기적을 행하는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그 영웅적인 기개 때문이 아닙니다. 나와 다를 바 없는 성정의 한 사람이 번민의 숲을 지나 순명에 이른 그 여정에 저는 감동합니다.

주님은 땅에 엎드려서 될 수만 있으면 이 시간이 자기에게서 비껴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막14:36). 이 기도는 대개 다 잘 알고 있기에 한 호흡으로 외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라는 간구와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라는 기도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가로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라는 접속부사가 이 두 심연을 잇고 있습니다. 신앙은 이런 것입니다. 나의 바람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번민과 중압감에 짓눌릴 때도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분투하고 계시건만 제자들은 모두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똑같은 상황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마침내 번민의 시간이 끝났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일어나서 가자, 보아라, 나를 넘겨줄 자가 가까이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렵고 떨리지만 가야 할 길이라면 피하지 않고 가는 것, 바로 그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일어나서 가자”. 영광을 누리기 위해 가자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가시려는 것일까요?

* 돈과 쾌락을 위해 사람을 도구로 삼았던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가자 하십니다.
* 지금 없는 것을 아쉬워하느라 이미 주어진 것을 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삶에서 벗어나자 이르십니다.
* 지금 설 땅을 잃고 절망의 심연에 빠져드는 이들에게 설 땅이 되어 주기 위해 가자 하십니다.
* 편협한 믿음에 갇힌 사람들, 광신적 믿음을 참된 믿음인 줄 알고 사는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참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함께 가자 하십니다.
*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더 이상 위축되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가자 이르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로마군인들의 행렬을 따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말을 탄 정복자가 아닙니다. 나귀를 타신 겸허하신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주님이 앞서 가진 그 길을 따라 가며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뿌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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