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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교회’와 ‘목사 교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아니라 세상의 속된 복을 구하는 비루한 욕망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세인들뿐만 아니라 교인들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거센 지탄을 받고 있는 한국 교회, 그리고 한인 교회가 하나님과 세상으로부터 사랑받는 건강한 교회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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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5-03 00:46
설교 만민에게 열린 교회
 글쓴이 : 라이트하우스
조회 : 57  
 > 영성 > 김기석 설교
만민에게 열린 교회
당당뉴스  |  webmaster@dangda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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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05월 03일 (일) 12:52:46 [조회수 :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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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에게 열린 교회
사56:6-8
(2020/05/03, 부활절 제4주, 교회설립기념주일)
음성으로 듣기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이방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여 주님의 종이 되어라.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고, 나의 언약을 철저히 지키는 이방 사람들은, 내가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겠다. 또한 그들이 내 제단 위에 바친 번제물과 희생제물들을 내가 기꺼이 받을 것이니, 나의 집은 만민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쫓겨난 이스라엘 사람을 모으시는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이미 나에게로 모아 들인 사람들 외에 또 더 모아 들이겠다.”]

∙내면의 나침반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교회 설립 112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임에도 불구하고 비대면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우리 교우들이 동시간대에 예배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맙기도 합니다. 저만치 어딘가에 서로를 그리워하는 이들의 불빛이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위안인지요.

마땅히 오늘을 경축해야 하지만 지금은 조금 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천 물류창고 공사 중에 일어난 화재로 죽어간 우리 이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유증기가 폭발하고 우레탄 폼에 불이 붙으면서 나온 유독가스로 많은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품이 되어주시기를 빕니다. 가슴에 깊은 응어리를 안고 살아갈 그 가족들에게도 위로를 베풀어주시기를 빕니다. 사망자들 다수가 비정규직이거나 일용직 노동자, 이주 노동자였습니다. 공기를 단축하고 비용을 줄이려는 사업가들의 조바심과 관리 감독 업무를 철저하게 하지 않는 관료들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습니다. ‘위험의 외주화’라는 말이 일상이 된 세상은 위험한 곳입니다. 재난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재난의 일차적 피해자는 늘 가난한 사람들이니 말입니다. 코로나19를 막기 위해 온 나라가 기울였던 노력을 이제는 이런 억울한 죽음이 발생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데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문명의 토대가 속절없이 흔들리는 것 같은 이 시대에 교회는 어떤 곳이어야 하고, 교회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깊이 숙고해야 할 때입니다. 많은 이들이 제도로서의 종교에 염증을 느끼고 교회를 떠났거나 떠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데 대한 절망감 때문일 것입니다. 감염병을 새로운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그런 탈교회 현상은 가속화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고 하여 비종교사회가 곧 도래할 것이라고 보는 것도 온당치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자기들의 불안한 마음을 붙들어 맬 어떤 영혼의 닻을 더욱 필요로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 흔들리고 사람들은 변하여도 나는 주를 섬기리/주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복음성가의 이 구절이 뱅뱅 귓전에 맴돕니다. 어느 것 하나 확실치 않은 현실 속에서 바장이고 있기에 우리는 모두 영혼의 나침반을 필요로 합니다.

독일 학자인 게랄트 휘터는 외부로부터 주어지고 밀려드는 여러 요구에 떠밀려 자신을 잃지 않도록 도와줄 나침반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게랄트 휘터, <존엄하게 산다는 것>, 박여명 옮김, 인플루엔셜, 2019, p.22). 그는 ‘존엄’에 대한 인식이 바로 그런 나침반이라고 말합니다. 자기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인식할 때 우리는 외부 세계에 의해 휘둘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는 우리 내면의 나침반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임을 잊지 않도록 해주고,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일깨우는 나침반 말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교회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있지만 저는 에베소서가 전해주는 비전을 뛰어넘는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엡1:23)

교회를 가리키는 두 가지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충만함’이 그것입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는 데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력으로 채워져 역동적으로 세상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끼리 자족하는 모임이 교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충만함이란 그런 것입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교인들은 다 개별적인 존재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우연히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택함과 구원의 신비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미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또한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사람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롬8:30). 정하심, 부르심, 의롭게 하심, 영화롭게 하심이 모두 주님의 섭리와 은총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을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가득 채우시고 싶으시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이 벌레 같은 죄인’ 하며 스스로 비하할 것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아멘’으로 수용하면 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중심이십니다. 비록 더디더라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얻으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과 접속에 실패한다면 평생 교회 다녀도 아무 보람이 없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en Christo) 있어야 한다고 거듭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을 ‘교회 안에’라고 편리하게 대치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이웃과 세상을 보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삶 자체가 영화로운 삶입니다. 누리고 싶은 것을 다 누리는 게 영화로움이 아닙니다. 뜻을 알고 사는 삶, 그 뜻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자기를 내놓는 삶, 누군가에게 자기를 선물로 주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누릴 영화로움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더 큰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가르치는 사람, 선포하는 사람, 복음 전하는 사람, 찬양하는 사람, 섬기는 사람....은사에는 경중이 없습니다. 그러니 차별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서로를 귀히 여기고, 인정하고, 고마워해야 합니다. 그 모든 은사들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잘 활용될 때 ‘그리스도의 몸‘은 든든히 서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가 커지고, 각 사람이 제각각 다른 소리를 내거나, 특정한 사람들의 의사가 사람들을 억압할 때 교회는 경직되고 맙니다. 로마 제국의 통치 논리와 성전 체제의 위선을 폭로했던 예수님의 전복적인 메시지가 더 이상 허용되지 않을 때 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회의 두 기둥
코로나19 이후 시대의 교회가 어떻게 변할 것인지를 염려하는 이들이 아주 많습니다. 이것은 교회에 주어진 큰 도전이지만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겨울을 나기 위해 잎을 떨구는 나무처럼 우리도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고, 본질적인 것에 집중할 때 교회는 더욱 든든히 설 수 있습니다. 이사야에게 우리의 길을 물어보려 합니다. 66장으로 구성된 이사야서는 사실은 각기 다른 세 시대의 문헌들이 합쳐진 것입니다. 편의상 1장부터 39장까지를 제1이사야서라 하고, 40장부터 55장까지를 제2이사야서, 그리고 56장부터 66장까지를 제3이사야서라 합니다. 제1이사야서는 예루살렘이 망하기 전인 주전 8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제2이사야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제3이사야는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후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회복된 공동체에 대한 비전이 많이 나옵니다. 제3이사야서의 첫 대목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공의를 행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곧 나타날 것이다‘”(사56:1)

‘공평‘(mishpat)과 ‘공의’(tsedaqah)는 새롭게 회복되는 신앙 공동체의 두 기둥입니다. 돈이 많고 유력한 사람이라 해서 법을 굽게 적당히 집행하면 안 됩니다. 가난한 사람이라 해서 법을 어겨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법은 공평하게 집행되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토대라 할 수 있는 신뢰가 무너진 것은 법이 불공평하게 집행된다는 의혹 때문입니다. 그러나 법 만능의 사회 또한 건강하다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소득의 차이가 계급의 차이로 고착되는 세상을 불의한 세상으로 보십니다. 승자 독식 사회, 패배 부활전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는 내부에 ‘분열의 씨앗’을 심는 사회입니다. 잠시 뒤쳐진 사람들에게도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기회가 제공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공의입니다.

이사야는 공평을 지키고 공의를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공평을 지키고 공의를 지키는 사람은 자기 성채 속에만 갇혀 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타자들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들과 슬기롭게 공존할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가끔 EBS에서 방영하는 <세계테마기행>을 볼 때가 있습니다. 세계 각지의 아름다운 풍경과 삶을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끌어가는 프리젠터(presenter)의 역할이 참 중요합니다. 풍경이나 사람들을 단순히 보여주고 소개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금방 그곳 사람들과 친밀해져서 흉허물없이 어울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낯선 이들 사이에 있는 거리감을 순식간에 좁힙니다. 사귐의 장인들입니다. 우리가 만나고 함께 살아야 할 타인들을 여러분은 어떻게 인식하고 계십니까? 미쉘 꽈스트(Michel Quoist)는 두 가지를 함께 제시합니다.

“타인(他人)이란─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 이웃에 사는 사람, 함께 일하는 사람, 당신처럼 기쁨과 슬픔의 의미를 아는 사람, 당신이 참을 수 없는 사람, 길에서 지나치기는 하지만 한 번도 말을 걸어 본 일이 없는 사람,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전혀 생각해 보지도 못한 사람.”
“타인이란─당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형제가 됨으로써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사랑으로 결합해야 할 사람, 당신이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취된 보편적 구원의 행진에 참가하고자 한다면, 사랑으로 결합해야 할 사람.”(미쉘 꽈스트, <참 삶의 길>, 조철웅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1989년, p.127)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속합니까? 미쉘 꽈스트는 “타인이란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어진 사람, 또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사랑의 요청, 타인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할 때 평화가 시작되는 것 아닐까요?

∙찾아가는 환대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려는 세상에서 배제되어도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사야는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비록 고자이거나 이방인이라 해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방인들이 만일 ‘주님께서 나를 당신의 백성과는 차별하신다‘고 말하도록 하거나, 고자들이 ‘나는 마른 장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만든다면 그런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도 아끼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나서의 결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나는 원수의 나라 앗시리아를 멸하지 않는 하나님의 처사에 성을 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욘4:11)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낌이야말로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입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에 잇대어 살려는 사람들을 주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여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쫓겨난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으시는 분“이십니다. 쫓겨나서 설 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설 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신앙 공동체의 소명입니다. “나의 집은 만민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주님의 교회는 그러해야 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교회들이 교인증을 발부하거나 QR 코드를 부여하여 출입자들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감염을 막기 위한 조치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왠지 좀 불편합니다. ‘모두에게 열린 교회’, ‘환대의 공동체’는 불가능한 것일까요? 이런 고민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어느 분이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마음에 크게 와닿았습니다. ‘찾아가는 환대’라는 개념이 그것입니다. 사실 이 말은 ‘흩어지는 교회’라는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렵고 외로운 이들 곁으로 교회가 나아가야 합니다. 이사야 58장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 무엇인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진짜 금식이라는 것입니다(사58:6-7). 비록 더디더라도 교회는 꾸준히 이런 방향으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점점 이런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기를 빕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한 주간도 평안과 기쁨 속에 사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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