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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교회’와 ‘목사 교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아니라 세상의 속된 복을 구하는 비루한 욕망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세인들뿐만 아니라 교인들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거센 지탄을 받고 있는 한국 교회, 그리고 한인 교회가 하나님과 세상으로부터 사랑받는 건강한 교회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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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7-25 23:40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것
 글쓴이 : 라이트하우스
조회 : 244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것
마15:1-9
(2020/07/19, 성령강림 후 제7주)
음성으로 듣기

   
 

 [그 때에 예루살렘에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당신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어기는 것입니까? 그들은 빵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내게서 받으실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었습니다' 하고 말만 하면, 그 사람은 제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이렇게 너희는 너희의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 위선자들아! 이사야가 너희를 두고 적절히 예언하였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

∙고요함에 대한 갈망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벌써 초복이 지나 장마철에 접어들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기후 위기의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홍수로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고, 북극의 빙하가 빠른 속도로 녹아내리고, 시베리아에서도 곳곳에서 산불이 번지고 있습니다. 지구 생태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두렵게 실감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도 생태계 파괴와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루는 권력의 생태계도 건강하지 못합니다. 서울시에서 벌어진 다양한 형태의 젠더 문제는 우리 사회가 아직도 남성 중심적 문화를 청산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배의 온 몸에 끓는 물을 부으며 학대한 20대의 이야기를 들으며 소름이 끼쳤습니다. 인간실격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릅니다.

여러 해 전에 세상을 떠난 영성신학자 헨리 뉴엔은 신부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울적한 기분을 떨쳐버리기 어렵고, 사람들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 같고, 사람들에게 조롱당하는 것 같고, 혼돈에 빠진 것 같은 느낌에 시달리기도 했음을 고백한 바 있습니다. 별것도 아닌 것들 때문에 자기의 감정적 균형이 크게 흔들리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두운 충동에 속절없이 이끌리는 자기 마음을 성찰한 끝에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빛보다 어둠을 선호했다고 고백합니다. 사람이 어둠에 이끌리는 까닭은 그것이 상당한 만족과 자신감을 주기 때문입니다(헨리 뉴엔, <새벽으로 가는 길>, 성찬성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1992, p.212). 어두운 만족감에 취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결국 더 깊은 어둠과 공허 속에 빠져들게 마련입니다.

이게 우리 현실입니다. 세상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만물이 다 지쳐 있음을 사람이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으며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전1:8)는 전도서 기자의 탄식이 자꾸만 떠오르는 나날입니다. 부질없는 모든 말을 다 내려놓고 세상의 소음과 결별한 채 잠시라도 머물 수 있는 장소가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에 자주 사로잡힙니다. 조용한 가운데 무릎을 꿇고 있을 수 있는 장소, 하나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는 장소, 가만히 있어도 숨을 편히 쉴 수 있는 장소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우리 영혼의 쉼터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전통에 집착하는 위험
예수님과 제자들이 게네사렛 땅에 머물고 있던 어느 날 예루살렘으로부터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것은 제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의 행태에 대해 시비를 걸고, 그의 가르침을 무력화하기 위해 왔습니다. 아마도 율법 해석에 관한한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그들은 다짜고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어기는 것입니까? 그들은 빵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습니다.”(마15:2)

‘어찌하여’라는 말 속에는 반드시 지켜져야 할 ‘장로들의 전통’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데 대한 고발이 담겨 있습니다. ‘전통’은 한 공동체의 오랜 기억과 습속이 축적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한 공동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반응하는 방식이 전통으로 굳어지곤 합니다. ‘장로들의 전통’은 율법 해석을 독점했던 소위 지식인들의 가르침을 뜻합니다. 그건 권위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마치 조선의 사대부들이 주자학적 질서에 집착했던 것과 유사합니다. 그들은 성현들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데 집중했을 뿐, 새로운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지는 못했습니다. 기본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성현들의 가르침을 풀어 설명할 수는 있어도 새로운 가르침을 만들어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정이 활달했던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 선생 같은 분은 정조 임금으로부터 잡다한 글을 쓰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를 받기도 했습니다.

전문가를 자부하는 이들일수록 변통할 줄 모르는 폐단을 보입니다. 전문가보다는 오히려 아마추어가 사고의 유연성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아마추어라는 말은 라틴어 amator에서 유래한 말인데 애호가(lover)를 뜻합니다. 이름을 날리거나 밥을 벌어먹기 위해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서 하는 이들이 아마추어입니다. 그들은 늘 배움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종교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전문성이지만, 그의 태도는 아마추어적이어야 합니다. 뭐든 새롭게 배우려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전통은 참 중요합니다. 감리교를 시작한 존 웨슬리도 ‘경험’을 감리교 신앙의 4대 원리 가운데 하나로 꼽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라는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깊이 접속하려는 소망을 품고 삽니다. 그 순례길을 가는 동안 우리는 앞서 그 길을 걸어갔던 분들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은 참을 찾아가는 이들이 만나게 마련인 여러 가지 장애물들을 미리 일러주고, 그 과정 가운데 찾아오는 두려움과 권태와 나른함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귀한 가르침을 줍니다. 전통적인 지혜는 그런 의미에서 유용하지만, 그 가르침에만 집착하면 안 됩니다. 저마다 자기 시대의 도전에 응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철학자인 칼 야스퍼스는 “전통의 샘은 현재에서 새롭게 실현되기 위해 포착될 때에만 샘솟는 것”(칼 야스퍼스, <철학적 신앙>, 신옥희 옮김,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79, p.31)이라고 말했습니다. 유구한 전통만 자랑할 게 아닙니다. 그 전통의 샘에서 새로운 샘물을 길어 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고르반 제도의 악용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옭아맬 든든한 밧줄을 가지고 왔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을 어긴다는 것만으로도 예수는 유대교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존재로 낙인찍힐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그들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해 가타부타 대답하시지 않고 오히려 다른 질문을 그들에게 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느냐?”(15:3).

“너희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내게서 받으실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었습니다’ 하고 말만 하면, 그 사람은 제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이렇게 너희는 너희의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15:5-6)

소위 ‘고르반’ 제도에 대한 비판입니다. 고르반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라는 뜻입니다만 바벨론 포로기 이후의 유대교에서는 그 단어가 일종의 ‘맹세어’처럼 변질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신앙의 진정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기 소유물 가운데 어떤 것이 고르반 되었다고 선언하곤 했습니다. 자기 소유를 바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고르반 선언을 했다고 하여 곧 하나님께 바쳐야 했던 것은 아닙니다. 살아있는 동안 사용권을 행사하되 사후에는 성전에 귀속되도록 하면 됐습니다. 고르반이라는 것이 굳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떤 제도도 악용되게 마련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습니다. 유대교에서 부모를 부양하는 것은 자식의 당연한 도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자식은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을 고르반 되었다고 선언함으로써 부양의 의무에서 벗어나곤 했습니다. 경건을 가장한 자기 이익의 확대인 셈입니다.

성전체제를 유지하려는 이들은 당장 수입으로 잡히지 않더라도 때가 되면 성전의 재산이 늘어난다고 보았기 때문에 고르반 제도를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질문은 어느 계명이 더 본질적인 것이냐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근본 계명을 장로들이 가르친 ‘고르반 제도‘를 통해 무력화하는 것이 과연 합당하냐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선자’라 부릅니다. 헬라어로 위선자를 뜻하는 ‘히포크리테스‘(hypokrites)는 기본적으로 연기자를 가리킵니다. 속마음과 겉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스스로 경건하다 자부하는 이들 가운데는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을 경멸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행동합니다.

플라톤의 책 <국가>에서 글라우콘이라는 사람이 들려주는 기게스의 반지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리디아의 왕에게 고용된 목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심한 뇌우와 지진으로 땅이 갈라진 것을 보고 그는 그 틈으로 내려가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청동 말 한 필과 사람 크기보다 더 큰 시체 한 구를 발견했습니다. 기게스는 시체의 손가락에 있는 금반지를 빼 자기 손에 끼었습니다. 시간이 좀 흐르고 왕에게 보고하러 갈 시간이 되자 목자들이 모여 그 동안 있었던 일을 함께 나누고 있었습니다. 무료했던 기게스가 반지의 보석받이를 자기 손 안쪽으로 돌려봤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자기 몸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반지의 보석받이를 밖으로 돌리자 자기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기게스는 궁궐로 들어가 반지를 이용해 왕비와 간통하고 왕을 살해한 후 왕국을 장악했습니다. 글라우콘이 이 이야기를 통해 들려주고 싶었던 메시지는 사람들의 올바른 처신은 내면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외적 강제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플라톤, <국가·政體>, 박종현 역, 서광사,1997, p.128ff). 기게스의 반지가 있다면 우리는 좀 다를까요?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말하면서도 내심으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있었던 속내를 폭로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이 우리 속에 있는 경외심 혹은 도덕 감정 때문입니까? 아니면 누군가 보고 있다는 두려움 때문입니까? 어떤 분은 우리 시대를 가리켜 양심조차 아웃소싱 되거나 다른 이들에게 위임된 시대라고 말합니다. CCTV가 우리 행동을 규제하고 있다는 뜻일 겁니다.

∙하나님 공경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면서도 마음으로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교리를 지킨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헛되이 예배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인간의 겸허한 자기 성찰에서 시작됩니다. 시편 시인은 온 우주 만물을 조화롭게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시8:4) 하고 고백합니다. 또 다른 시인은 “내가 이렇게 빚어진 것이 오묘하고 주님께서 하신 일이 놀라워, 이 모든 일로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시139:14)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이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속에 하나님의 숨결이 깃들어 있음을 매순간 경험하며 삽니다. 후기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잃어버린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놀라고 경탄할 줄 아는 능력이 아닐까요? 삶이 선물이라는 것, 삶은 여전히 힘겹지만 우리 일상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은총이 당도하는 시간이라는 감각을 잃어버려 우리는 빈곤감에 시달립니다. 칸트는 우리 마음을 감탄과 외경심으로 채워주는 것 둘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별이 빛나는 하늘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속에 있는 도덕률입니다. 별이 빛나는 하늘을 바라볼 때 인간은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있는 도덕률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나 좋을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복되게 하며 사는 것이 인생임을 일깨워줍니다. 하나님 공경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예수의 뒤를 따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의 길을 따르고 있습니까? 장로들의 전통, 교회의 가르침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잘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삶의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탄식이 도처에서 들려옵니다. 하나님의 빛 속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 빛이 인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주님이 앞서가신 그 길 위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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