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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교회’와 ‘목사 교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아니라 세상의 속된 복을 구하는 비루한 욕망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세인들뿐만 아니라 교인들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거센 지탄을 받고 있는 한국 교회, 그리고 한인 교회가 하나님과 세상으로부터 사랑받는 건강한 교회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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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3-14 19:51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
 글쓴이 : 라이트하우스
조회 : 76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

막 12:38-40
(2021/03/14, 사순절 제4주)

음성으로 듣기

   
 

 [예수께서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서로 안에 있는 존재
주님의 은혜와 평강을 기원합니다. 민주화를 요구하며 투쟁하고 있는 미얀마 사람들을 기억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청합니다. 기온은 온화하지만 미세먼지가 많은 나날입니다. 맑고 푸른 하늘, 청명한 대기가 그립습니다. 대기가 깨끗하면 우리 마음조차 맑아지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맑고 따뜻한 사람을 만나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맑은 사람일까요? 12세기 송나라 학자인 주희(朱熹, 1130-1200)는 <근사록>에서 한 가지 실마리를 던져줍니다. “남을 이기려 하거나, 자신을 내세우고, 원망하거나,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은 오직 인자(仁者)만이 할 수 있다.“(주희·여조겸 엮음, <근사록>, 이기동 옮김, 홍익출판사, p.269). 그의 말대로 남을 이기려 아등바등하지 않는 사람, 다른 이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사람, 늘 불퉁거리며 남을 원망하지 않는 사람, 제 욕심에 따라 살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런 이들과 만나면 우리도 마음의 경계심을 풀고 나답게 지낼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나 아我‘ 자는 손(手)에 창(戈)을 든 모습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창은 전쟁을 연상시킵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과 만난 후에 우리 영혼이 피를 흘리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사람을 사회적 동물이라 한 이도 있습니다만 사람은 홀로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28년 동안 무인도에서 살았던 소설 속 인물 로빈슨 크루소도 문명사회의 기억을 간직했기에 그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는 홀로였지만 늘 누군가를 갈망했던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말 속에 이미 인간의 본질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사는 게 인간입니다. ‘너‘ 없이는 ‘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잠들게 하신 후에 그 갈비뼈를 뽑아 ‘여자’를 만들었다는 창세기 말씀은 모든 생명이 서로에게 속해 있음을 가르칩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도 인간을 가리켜 ‘Mit-einander-sein‘ 즉 ‘서로 함께 존재’라 했습니다. 사귐의 가장 아름다운 방식은 ‘서로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서로 안에 있음’을 다른 말로 하면 ‘사랑’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대’가 내 마음을 온통 차지합니다. 예수님도 이 사랑의 신비를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요14:20). 삼위일체는 이런 사랑의 신비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런 신비 속으로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습니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관계 때문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재배치하려고 합니다. 이해가 충돌하고 갈등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갈등을 슬기롭게 풀어내고, 다른 이들과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나 자기 욕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교회 안에도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각과 지향이 다르고, 삶을 대하는 자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우리는 그런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하라는 초대를 받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구별 짓기 욕망
공동체를 이루려는 이들은 날마다 자기중심적 사고를 덜어내야 합니다. 성찰과 자기 닦음이 없는 신앙생활은 공허합니다. 성찰은 돌이켜 자기를 보는 것이고, 자기 닦음은 결국 문제는 남이 아니라 자기임을 알아차리고 욕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고백과 삶 사이의 거리가 멀어질 때 사람들은 그 틈을 허위의식으로 채우려 합니다. 자기는 특별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남을 비난함으로 자기를 정당화하려 합니다. 가엾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합니다. 예복이라 번역된 ‘스탈레stole‘는 왕이나 제사장 혹은 고관들이 입던 겉옷을 말합니다. 옷은 두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실용적 기능과 사회적 기능입니다. 추위를 막고 피부를 보호하는 것이 실용적 기능이라면, 벌거벗은 몸을 가려줌으로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 사회적 기능입니다. 김흥호 목사님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옷’이라는 글자를 네 가지로 분해해서 설명합니다. 동그라미는 하늘이고, 가로 그은 선은 땅이고, 내리 그은 선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과 땅과 사람만 가지고도 인간의 문제는 풀리지 않습니다. 그 셋을 받쳐주는 것이 그리스도입니다(김흥호, <생각 없는 생각>, 솔, p.206). 그 셋이 그리스도와 만나 이룬 것이 옷입니다. 우리 인생의 부끄러움과 두려움은 그리스도를 만날 때 사라집니다. 바울 사도도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롬13:14)라고 성도들에게 권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사람다운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은 남을 존중하고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이 입던 예복은 자기와 남을 구별해주는 일종의 기호였습니다. 그 옷은 ‘나는 너와 신분이 달라’, ‘나는 너보다 거룩한 사람이야’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차가운 구별 짓기입니다. 그리스도의 옷과는 달라도 많이 다릅니다. 그 예복은 남들과 구별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줍니다. 우리 시대에도 이런 예복은 있습니다. 명품, 좋은 차, 고급 아파트, 돈이 많이 드는 취미 활동 등이 그것입니다. 그런 예복에 집착하는 순간 그리스도의 마음은 스러지고 맙니다.

율법학자들은 또 인사 받기를 좋아합니다. 자기가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시시각각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려 합니다.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면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들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높이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생 텍쥐페리의 <어린왕자>가 떠오릅니다. 어린왕자는 자기 별을 떠나 지구에 도착하기까지 여러 별을 방문합니다. 두 번째 별에는 허영꾼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린왕자가 그의 모자가 이상하게 생겼다고 말하자 그는 “사람들이 내게 환호를 보낼 때 답례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 속상하다며 어린왕자에게 박수를 쳐달라고 부탁하고, 나중에는 자기를 숭배해달라고까지 부탁합니다. 숭배가 뭐냐고 묻자 그는 “내가 이 별에서 가장 잘 생겼고, 가장 옷을 잘 입고, 가장 부유하고, 가장 똑똑하다는 거’라고 대답합니다. 나르시시스트입니다. 인사 받기를 바라는 마음도 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속상해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 선행을 알리는 데 열중합니다. 그렇게 하여 추종자를 만들고, 그들의 찬사를 들어야 안심합니다. 불행한 영혼입니다. 주님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르셨습니다. 쉽지 않지만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다른 이들의 칭찬에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틈을 만드는 사람들
율법학자들은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합니다. 자리처럼 예민한 게 또 있을까요? 사회적 위계를 잘 파악하고 그 위계에 맞는 처신을 잘해야 사람들은 사회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위계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따돌림 받거나 처벌을 받습니다. 군대에서 훈련받을 때가 생각납니다. 지프차를 탈 때 선임자의 자리는 어디인지, 운전자가 상급자인 경우에는 어디에 앉아야 하는지, 승용차일 때는 어떤 자리가 높은 자리인지…. 뭐 그리 복잡한지 모르겠습니다. 이게 다 권위주의 시대에 위계질서를 내면화하고 살도록 우리를 길들이려는 책략이었습니다.

몇 년 전에 들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기독교인들의 연합모임을 준비하느라 단상에 의자를 배치하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이 아주 크고 고급스러운 의자를 가져와 정중앙에 놓았습니다. 실무자들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아무개 목사님의 비서’라고 자기 소개를 하더랍니다. 그가 모시는 분은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크기의 신화에 사로잡히는 순간 영혼은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씁쓸하게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3.1운동 때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한 후에 남강 이승훈의 이름을 먼저 쓸지 손병희의 이름을 먼저 쓸지 다투는 것을 보고, 남강이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순서는 무슨 순서, 그거 죽는 순서야. 손병희 이름부터 써.“ 어딜 가나 높은 자리, 윗자리에 앉으려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잔치 자리에 가거든 높은 자리에 앉지 말고 맨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가르치셨습니다(눅14:8, 10). 처세술에 대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자기가 기대하는 자리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하여 화를 내거나 비애에 빠지는 사람은 아직 성숙한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자기애에 빠진 사람일수록 특권을 좋아합니다. 윗자리에 대한 관심에 전전긍긍할 때 진실에서 더욱 멀어집니다. 자발적으로 특권을 내려놓는 사람은 긴장된 관계 속에 틈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김지하 시인은 ‘틈’이라는 시에서 “갇힌 삶에도 봄 오는 것은 빈 틈 때문”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주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땅에 내려오심으로 구원의 문을 여셨습니다.

38절과 39절은 ‘~ 하기를 좋아하고‘라는 구절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예복을 입고 다니는 것, 인사 받는 것, 높은 자리에 앉는 것, 윗자리에 앉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은 병든 마음입니다. 일종의 속물병입니다. 겉으로는 근사해 보이지만 속은 썩어 문드러진 것입니다. 마음이 헛헛하기에 그들은 외적인 것들을 통해 보상받으려 합니다. 문제는 그럴수록 더욱 누추해 보인다는 데 있습니다. 그 누추함을 남들은 다 아는 데, 자기만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주님은 더 심각한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토라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관심’일 것입니다. 그런데 토라를 잘 안다는 이들이 오히려 사회적 약자의 대명사인 과부들의 가산을 삼킨다는 것입니다. 이건 아마도 그 당시에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었을 겁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신심을 이용해 제 배를 불리는 성전체제를 두고 예수님은 ‘강도의 굴혈’이라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율법의 권위자를 자처하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더욱 더 큰 어려움 속으로 밀어대는 이들을 보고 주님은 분노하십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 그들이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는 사실입니다. 기도조차 자기 탐욕과 위선을 가리기 위한 의상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라는 말 속에 타락한 종교의 실상이 다 담겨 있습니다.

이어서 나오는 과부의 헌금 이야기는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은 헌금함 맞은쪽에 앉아서, 무리가 헌금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많은 돈을 넣는 부자가 여럿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렙돈 두 닢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습니다. 고드란트는 로마에서 목욕탕에 입장할 때 내는 요금이었다고 하는데,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한 1,000원쯤 된다고 보면 됩니다. 주님은 그 여인이 누구보다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 속에는 여인의 헌신에 대한 칭찬이라기보다는 그런 여인의 돈까지 착취하고 있는 성전 체제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습니다. 앞에서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는 말을 떠올리면 됩니다. 이익의 문제 앞에서 담백해지지 않는 한 어떤 진리 주장도 신학적 언설도 허위에 불과합니다. 모든 이익을 다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익이라는 동기가 우리 삶의 모든 결정권을 쥐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탐욕이 우상숭배(골3:5)라는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우리 또한 남들과 구별되기를 바라고, 인사받기를 좋아합니다. 높은 자리에 앉고 좋은 대접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조금씩 내려놓을 때 우리 속에 여백이 생길 것이고, 그 틈으로 하늘의 숨결이 깃들 겁니다. 그 숨과 만날 때 우리는 비로소 생명과 평화를 파종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찌푸린 얼굴들이 많이 보입니다. 거리나 공공장소에서 터무니없이 화를 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련된 교양인의 얼굴을 하고 자기 욕심만 차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확고한 계급의식을 가지고 사람들을 도구로 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폭력과 테러가 끊이질 않습니다. 이런 혼돈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라는 부름 앞에 서 있습니다. 사순절이 깊어갑니다. 부끄러운 옛 사람의 옷을 벗고 아낌과 존중, 그리고 사랑을 섞어 만든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때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도래하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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