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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교회’와 ‘목사 교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아니라 세상의 속된 복을 구하는 비루한 욕망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세인들뿐만 아니라 교인들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거센 지탄을 받고 있는 한국 교회, 그리고 한인 교회가 하나님과 세상으로부터 사랑받는 건강한 교회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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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4-25 21:16
머릿돌이 되신 예수
 글쓴이 : 라이트하우스
조회 : 983  
 > 영성 > 김기석 설교
머릿돌이 되신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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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4월 25일 (일) 14:34:28
최종편집 : 2021년 04월 25일 (일) 15:59:33 [조회수 :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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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돌이 되신 예수
행 4:5-12
(2021/04/25, 부활 후 제4주)

음성으로 듣기

 

   
 

[○이튿날 유대의 지도자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를 비롯해서,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그 밖에 대제사장의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그들은 사도들을 가운데에 세워 놓고서 물었다. "그대들은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 그 때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그들에게 말하였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장로 여러분, 우리가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과 또 그가 누구의 힘으로 낫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라면, 여러분 모두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 이 예수는 '너희들 집 짓는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은 돌이지만,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꾼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여전히 위태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들과도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며칠 전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한 법원에서 열린 재판에 주목했습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실 겁니다. 데릭 쇼빈(Derek Chauvin)이라는 경찰관이 조지 플로이드라는 40대 남성의 목을 무릎으로 눌러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 말입니다. 조지 플로이드는 27번이나 ‘숨을 쉴 수 없어요’라고 외쳤습니다. 미국에서 흔히 벌어지던 그 사건이 공론화된 것은 그 현장을 녹화했던 17살 여성이 그 영상을 공개하면서부터였습니다.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는 캠페인이 도처에서 벌어졌고, 미국 사회의 유색인종 차별에 경종이 울려졌습니다. 최근에는 아시아인 혐오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 배심원들은 경찰관인 데릭 쇼빈의 유죄를 평결하고 2급, 3급 살인죄를 적용했습니다. 그 재판 과정을 지켜본 많은 이들이 안도했습니다. 정의가 실현된 것처럼 여겼기 때문입니다. 잘 된 일이긴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건이 데릭 쇼빈이라는 한 문제적 개인의 일탈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그것은 시스템의 문제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썩은 사과 담론’(bad-apple narrative)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불의가 행해지는 시스템은 그대로 놔둔 채 개인의 도덕성 혹은 폭력성 문제로 환원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조지 플로이드의 억울한 희생이 그냥 망각의 강에 떠내려가지 않고 사회변화의 소중한 단초가 되어 다행입니다. 며칠 전 미국 하원은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 범죄 금지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세상은 아픔을 통해 조금씩 변화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22일은 ‘지구의 날’이었습니다. 기후 위기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우울한 전망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경제 문제에 올인(all-in)하고 있지만 그럴수록 피조 세계의 신음소리는 높아만 갑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이들은 생태계를 돌보는 일이 신앙적 과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자이시고 보존자이십니다. 다양한 생명이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꿈일 겁니다. 그러나 가장 늦게 이 지구에 초대받은 인간이 그 생태계의 질서를 교란시키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약자, 돌보아야 할 이웃은 신음하는 피조세계가 아닐까요? 이제는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습니다. 지금 불편한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플라스틱을 덜 사용하고, 육식을 줄이고, 에너지 사용을 최소화하는 것으로 병든 지구가 회복될지는 모르겠지만, 피조세계의 탄식을 모른 체 하지 않으려는 마음들이 모일 때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문제의 크기에 압도되어 ‘아무리 그래 보아야 소용이 없다’는 비관주의에 빠진 이들도 있습니다.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기에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 그러하고, 평화를 증진하는 일이 그러합니다. 우리는 바로 그 일을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 시대의 지배적 가치를 그냥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때로는 그 가치를 거스르며 하나님 나라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무슨 권세로, 누구의 이름으로?
오늘 본문은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 벌어진 일들을 보여줍니다. 이야기의 발단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 사람들에게 구걸하던 사람을 고쳐준 일입니다. 그는 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라고 외치며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자 그는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서 벌떡 일어나서 걸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놀라운 기적을 보고 솔로몬 행각에 모여들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빌라도의 재판과 유대인들의 완고함, 십자가 처형, 부활, 그리고 하늘로 올리우심. 그 일련의 과정을 마치 물 흐르듯 증언한 후 베드로는 “회개하고 돌아와서, 죄 씻음을 받으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강력한 메시지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람들에게 아직 말하고 있을 때 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두 가지 사실 때문에 격분했습니다. 첫째는 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예수의 부활을 내세워서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전통주의를 고수하던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체포되어 구금되었습니다. 다음 날 유대의 지도자들과 장로들, 그리고 율법학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고 대제사장 가문에 속한 사람들도 다 모였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가 열린 것입니다. 안나스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안나스 가문은 아주 오랫동안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들과 사위, 나중에는 손자까지 대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신앙의 명문가라 할 수 있을까요? 권력의 대물림이 아니었을까요?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이 있듯이 종교 권력을 독점하는 집안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강고한 권력 시스템을 위협하는 이들을 용납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음모를 통해 희생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예수의 이름’이 사람들 사이에서 호명되고 있었고, 그 이름을 통해 기적과 치유가 나타나고 있으니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가운데 세워 놓고서 물었습니다. “그대들은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4:7) 그들은 역시 노련합니다. 부활에 대한 가르침 때문에 격분했지만 그 문제는 숨겨둡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신학 논쟁이 벌어지면 자기들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판단이 섰던 것입니다. 그들은 ‘무슨 권세’,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했냐고 묻습니다. ‘이런 일’은 걷지 못하던 사람을 고쳐준 일을 이르는 말입니다. 성경 전문가들답게 그들은 ‘어떤 사람이 표징과 기적을 일으킨다 하여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말라. 마술이나 속임수, 혹은 악령의 도움을 받아 그런 일을 행하는 이들도 있다‘는 토라의 가르침을 떠올렸을 겁니다(신13:1-5). 그들의 질문 속에는 사도들의 행위는 무자격자의 불법 행위라는 판단이 깔려 있습니다.

∙예수는 누구인가?
이제 사도들이 답할 차례입니다. 그 유명짜한 사람들 앞에서 속된 말로 ‘듣보잡’에 불과한 이들이 자기들의 행위를 설명해야 합니다. 주눅이 들 법도 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당당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먼저 그는 자기들이 심문 받고 있는 내용이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 ‘그가 누구의 힘으로 낫게 되었느냐’의 문제냐고 반문합니다. 베드로는 병자에게 행한 일을 ‘착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의도적 진술입니다. 생명을 온전하게 하는 일은 선한 일입니다. 그 표현을 통해 베드로는 지도자들의 허위의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생명이 회복된 사건을 보면서도 무슨 권세로 그런 일을 하였느냐고 묻는 자체가 그들의 굳어짐을 보여줍니다. 베드로는 이어서 그가 ‘누구의 힘으로 낫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답합니다.

“여러분 모두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4:10)

백성의 지도자들 앞에서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자기 증언의 대상을 이스라엘 온 백성으로 확장합니다. 심문을 받는 자리이지만 그는 그 자리를 증언 자리로 삼습니다. 그 사람이 성한 몸이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이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라고 명토박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 시편118편 22절을 인용하여 말합니다.

“이 예수는 ‘너희들 집 짓는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은 돌이지만,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4:11)

모퉁이의 머릿돌은 건물을 지을 때 두 벽을 잇는 자리에 놓이는 돌을 가리킵니다. 다른 모든 돌들은 그 돌과의 관계 속에서 배치되어야 합니다. 시편118편에서 이 구절은 폭력 기계로서의 제국에 의해 유린당하곤 했던 이스라엘이 새로운 세상의 기초가 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연약한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오히려 제국의 질서를 뒤흔들고 새로운 세상의 견인차 노릇을 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이 그러하고, 십자가 사건이 그러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진실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고전1:27)

베드로는 이 말을 인용함으로써 자기들만의 제국을 만들어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이들의 위선과 폭력을 폭로하는 동시에, 그들에 의해 박해를 받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새 세상을 열어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 밖에 있으면서 믿는다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결정적인 말이 뒤따라 나옵니다.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4:12) 지금 사도들을 심문하고 있는 이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분을 떠나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에 대한 심문 자리가 오히려 그들의 죄를 드러내고 심판하는 자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름’이라는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라는 고유명사는 구원을 위한 부적이 아닙니다. 이름은 곧 그 존재를 뜻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예수의 존재, 즉 예수님의 마음을 온전히 내면화하고 사는 것이야말로 구원받은 삶이라는 말입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예수와 무관한 삶을 살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그 이름에 대한 오용에 불과합니다. 에스겔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탄식을 듣습니다.

“그들은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가는 곳마다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다. 그래서, 이방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주의 백성이지만 주의 땅에서 쫓겨난 자들’이라고 하였다.“(겔36:20)

죄 없는 사람의 피를 흘리고, 온갖 우상을 섬김으로 땅을 더럽히면서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품고 사는 이들에 대해 하나님은 염증을 느끼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이들을 배제하고, 혐오하고, 비아냥거리고, 자기의 거짓된 자아를 포장하기 위해 다른 이들을 공격하면서 예수의 이름을 들먹이는 이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이들로 인해 추문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씀이, 우리의 말과 행동이 모퉁이의 머릿돌이신 예수님과 연결되고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진실함은 ‘내가 믿나이다’라는 자기 진술이 아니라,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을 통해 입증됩니다. 생명을 풍성하게 하고, 평화의 기운을 북돋는 삶이야말로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자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나른한 손과 힘 빠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똑바로 걸으십시오”(히12:12-13a). 우리로 인해 더럽혀진 예수의 이름이 사람들 속에서 아름다운 이름으로 호명되도록 노력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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