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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1-11 21:20
믿음은 은혜인가, 의지적 선택인가?
 글쓴이 : 고마리
조회 : 377  
 > 칼럼
믿음은 은혜인가, 의지적 선택인가?
최재석  |  jschoi4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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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01월 11일 (화) 00:00:54 [조회수 : 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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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자들은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세 전에 구원받을 사람을 예정해 놓으셨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예정이요 은혜여서 우리의 의지나 노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정해져 있다면 전도는 무의미해진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든 전하지 않든 구원받도록 예정된 사람은 구원받게 되어 있으니까.
 
대학생선교회(C.C.C.)에서는 4영리를 가지고 전도한다. 선교회 회원들은 전도 대상자에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고, 우리는 죄에 빠져 있다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할 수 있다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을 받으라고 권면한다. 그 전도 대상자가 예수님을 영접하겠다고 말하면, 영접기도를 한다. 여기서는 믿음을 영접하는 것으로, 달리 말해서, 의지적 결단으로 보고 있다.
 
칼빈주의자들은 의지적 결단을 요구하는 4영리를 이단이라고 본다. 그런데 대학생선교회를 이끈 미국의 빌 브라이트와 한국의 김준곤이 모두 보수적 신앙인인데, 그들은 전도 대상자에게 의지적 결단을 요구했다. 부흥사 빌리 그레이엄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했다. 전도에 열심이었던 그들은 예정론자들과 달리 믿음은 각자의 결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믿음을 전적으로 은혜라고 말하는가, 아니면 의지적 결단이라고 말하는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의 믿음
 
예수님은 요한복음 11장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라고 마르다에게 물으셨다. 이때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대답했다. 
 
마르다처럼 “네가 믿느냐?”는 질문을 받는 경우에 우리는 믿는다고 답할 수도 있고 믿지 못하겠다고 답할 수도 있다. 어느 것을 택하든 그것은 답하는 사람의 판단에 의한 선택이다. 이때 기독교인은 믿는다고 답하고 비기독교인은 믿지 못하겠다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마르다는 믿음을 받아들였다. 여기서 믿음을 받들였다는 것은 믿음을 의지적으로 선택했다는 말이다.
 
누가복음 8장 40-42절과 49-56절에는 예수님이 회당장의 딸을 살리는 기사가 나온다. 회당장은 자기 딸의 병을 고쳐달라고 청하려고 예수님께 와 있었는데, 사람들이 와서 그 딸이 이미 죽었다고 전한다.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이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50)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권면은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그리고 믿으려고 노력하라는 말이다. 예수님의 이 권면에서 믿기 위해서는 의지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노력이다. 
 
마태복음 15장에서는 가나안 여자 하나가 예수님께 와서 자기 딸이 귀신 들렸는데 고쳐 달라고 소리쳐 청했다. 예수님은 그녀가 이방인인 것을 아시고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26)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여인은 그런 모욕적인 말에도 굴하지 않고 개 같은 자기에게 그 떡 부스러기라도 던져 달라고 간청했다. 예수님은 당신이 그 여인의 딸을 고쳐줄 수 있다고 믿는 그 여인에게 “네 믿음이 크도다”(28)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딸의 병을 고쳐주셨다. 
 
여기서 예수님은 그렇게 모욕적으로 말하면 그 여인이 십중팔구 돌아설 것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또는 그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 이방 여인은 예수님이 마음만 먹으면 자기 딸의 병을 고쳐줄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런 모욕을 참고 물러서지 않았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능력을 확신하는 그 여인에게서 ‘큰 믿음’을 보셨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24)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예수님이 전하신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믿는 데에는 우리의 판단과 의지가 작용하게 마련이다.
 
특히 요한복음 7장에 가면 믿는 자들이 성령을 받는다고 명시되어 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38-39) 성령의 역사로 믿는 것이 아니고 믿는 자들이 성령을 받는다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도행전 2장에서도 믿으면 성령을 받는다고 말한다. 베드로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38)라고 말했다.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세례를 받는 사람이 자신의 의지를 발휘해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것,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주로 믿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믿는 사람이 성령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
 
바울은 로마서 5장 1-2절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라고 말한다. 여기서 “이 은혜”는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는 우리가 믿음으로써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한자어로 ‘이신칭의’인데, ‘이신’은 ‘칭의’의 조건이다. 믿으면 의롭다 하심을 받지만, 믿지 않으면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 그리고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기 때문에, 칭의는 은혜지만, 칭의의 조건인 믿음은 은혜가 아니다. 
 
바울은 로마서 10장 9절에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말했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마음에 믿”어야 한다. 여기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다는 것과 마음에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의지적인 노력이 요구되는 일이다. 
 
그다음 10절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고 말했다. 그리고 14절에서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듣고 들어야만 믿는다고 말하고 나서 17절에 가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라고 14절의 내용을 반복 강조하고 있다. 로마서 10장 9-10절은 4영리의 전도현장을 상기시킨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기로 결단한다는 사실을, 믿음은 의지적 결단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이 믿음을 강조하는 구절에서 성령의 인도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전도 대상자에게 “예수를 믿으시오.”라고 말한다. 이때 우리는 상대의 결단을 요구한다. 바울도 사도행전에서 “주 예수님을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16:31)라고 상대의 결단을 요구했다. 믿음이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믿으려고 능동적으로 결단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믿어지고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의지적 결단이라고 말했다.
 
요한계시록에는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4:20)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하여 문을 여는 것은 분명히 의지적 선택이다. 
 
 
마치면서
 
믿음이 은혜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에배소서 2장 8절이다. 대부분의 교단에서 사용하는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그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여기서 “믿음으로 말미암아”가 “은혜에 의하여” 바로 다음에 오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은혜”를 “믿음”에 연결시켜서 믿음은 은혜에 의한 것이라고 읽었다. 
 
그런데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믿음이 은혜와 상관이 없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기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가 앞으로 나오고 그다음에 “은혜로”가 오기 때문에 믿음은 은혜와 상관이 없다. 따라서 믿음은 은혜에 의한 것이 아니다.  
 
NIV에서도 표준새번역처럼 번역했다. “For it is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through faith−and this not from yourselves, it is gift of God.” 이 번역에서도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명시되어 있다. “through faith”가 쉼표 다음에 오기 때문에 믿음은 은혜와 관계가 없다. 
 
개역개정 성경에서 에배소서 2장 8절의 “은혜에 의하여”를 “구원을 받았으니”로 연결시킨다면, 표준새번역 성경과 NIV에서처럼 믿음은 은혜와 관계가 없고 구원이 은혜에 의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 “은혜에 의하여”를 믿음에 연결시켜야 하는지 구원에 연결시켜야 하는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문맥에 의해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8절 조금 앞의 5절에 “그 은혜에 의하여”를 어떤 것에 연결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힌트가 나와 있다. 거기에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라고 언급되어 있다. 이 괄호 안에 있는 말에 주목하기만 하면, 8절에서 “은혜에 의하여”를 구원에 연결시켜야 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구절이 힌트인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하더라도, 신약 전체에서 은혜로 구원을 받고 믿음은 은혜와 상관이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문맥에 의해서 8절에서 “은혜에 의하여”를 구원에 연관시킬 수 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성경의 문맥은 물론 그 힌트조차 읽지 못하고 “은혜에 의하여”를 믿음으로 연결시켜서 믿음을 은혜에 의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개역개정 성경에 나오는 에베소서 2장 8절을 근거로 믿음이 은혜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은 이제 그 주장의 근거를 잃은 셈이다. 그러나 개혁자들을 추종하는 그들은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는 개혁자들의 주장에 의지해서 믿음은 전적으로 은혜에 의한 것이라고 계속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당대의 대표적인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루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이 살았던 16세기 이래로 증대해 온 인문주의의 세례를 받은, 본회퍼의 말대로, “성인된 세상”에 사는 현대인도 루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현대인은 하나님이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허락하셨다고 생각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에게서 원죄를 보았지만, 현대의 신학자들은 그에게서 자유의지의 원형을 본다.
 
18세기 이후로 일어난 중요 사건들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18세기 말에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의해서 배양된 프랑스 혁명의 표어는 자유, 평등, 우애였다. 19세기 중반에 일어난 흑인을 해방시키기 위한 미국의 남북전쟁은 흑인의 자유를 위한 전쟁이었다. 20세기에 와서 활발해진 여성해방운동은 차별받는 여자들이 자유를 쟁취하려는 운동이었다. 2차대전 후에 우후죽순처럼 일어난 식민지 해방 운동은 정치적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렇게 보면 세계의 근현대사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말할 만하다. 지금 우리는 인간에게는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망상이다.
 
20세기의 대표적인 기독교 변증자 C. S. 루이스는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적 동의로서의 믿음과 신뢰로서의 믿음을 구분하면서, 지적 동의,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특정 사실을 믿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지적 동의에서 한 인격에 대한 신뢰로서의 믿음으로 나아가서 “저는 할 수 없으니 주께서 이 일을 해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결정적인 순간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믿음에는 모두 인간 편에서의 의지적 결단이 요구된다.
 
루이스의 뒤를 이은 기독교 변증자 알리스터 맥그래스도 “믿음은 신뢰와 의탁의 문제”라고 말하면서 신뢰와 의탁이 인간 편에서 하나님을 붙잡는 일이라고 말했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해 ‘예’라고 말하고 삶과 사고의 견고한 기반으로 하나님을 붙잡는 신뢰와 동의의 행위다.” 하나님을 붙잡는 행위는 자유로운 사람의 의지적 결단이며 선택이다.
 
교회에서는 흔히 개혁자들의 주장을 따라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믿음은 전적으로 성령에 의해서 주어지는 은혜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러 방면에서 자유를 위해서 싸운 인간은 지금 자유를 누리고 있다. 현대의 기독교 변증자들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면서 믿음은 인간의 의지적 결단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복음서에서도, 사도행전에서도, 바울 서신서에서도,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도, 믿음은 은혜가 아니고 의지적 결단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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