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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교회’와 ‘목사 교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아니라 세상의 속된 복을 구하는 비루한 욕망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세인들뿐만 아니라 교인들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거센 지탄을 받고 있는 한국 교회, 그리고 한인 교회가 하나님과 세상으로부터 사랑받는 건강한 교회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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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2-25 20:35
기브롯 핫다아와
 글쓴이 : 라이트하우스
조회 : 270  

기브롯 핫다아와
민 11:31-35
(2022/02/20, 주현 후 제7주)

음성으로 듣기

   
 

[주님께서 바람을 일으키셨다. 주님께서 바다 쪽에서 메추라기를 몰아, 진을 빙 둘러 이쪽으로 하룻길 될 만한 지역에 떨어뜨리시어, 땅 위로 두 자쯤 쌓이게 하셨다. 백성들이 일어나 바로 그 날 온종일, 그리고 밤새도록, 그리고 그 이튿날도 온종일 메추라기를 모았는데, 적게 모은 사람도 열 호멜은 모았다. 그들은 그것들을 진 주변에 널어 놓았다. 고기가 아직 그들의 이 사이에서 씹히기도 전에, 주님께서 백성에게 크게 진노하셨다. 주님께서는 백성을 극심한 재앙으로 치셨다. 바로 그 곳을, 사람들은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다. 탐욕에 사로잡힌 백성을 거기에 묻었기 때문이다. 백성은 기브롯 핫다아와를 떠나, 하세롯으로 행군하였다. 그들은 하세롯에서 멈추었다.]

• 불평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이제 주현절의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어제는 우수雨水였습니다. 우수가 되면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옛말이 무색할 정도의 날씨입니다. 대기가 차가워진 탓인지 미세 먼지는 한결 덜합니다. 미세 먼지는 덜하지만 지금 우리가 호흡하는 대기 중에는 뭔가 음울한 것들이 깃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해처럼 환한 얼굴을 만나기 어렵고, 담담한 어조로 말하는 이들 만나기 어렵습니다. 서슬 퍼런 말들이 마구 횡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요즘 가급적이면 많이 걸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찬바람을 뚫고 이 골목 저 골목 걷다 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콧노래를 흥얼거리게 됩니다. 요즘 계속 떠오르는 것은 아주 오래 전에 부르곤 했던 ‘참된 자유’라는 노래입니다. “불평 불만과 환멸 가득 찬 이 세상에 너는 무엇 위해 사는가 참된 자유와 평화 너는 맛보았는가 너는 무엇 위해 사는가//괴로운 인생 길을 헤매는 나그네여 어디서 안식을 얻겠나 어둠이 에워싸고 찬 바람 부는 이 밤 어디서 안식을 얻겠나”. 이 노래는 의문형 종결어미로 끝납니다. 질문이 있어야 답도 있는 법입니다. ‘불평 불만과 환멸 가득 찬 이 세상’이라는 표현은 우울하지만 우리 시대의 실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화가 난 것처럼 보입니다. 삶은 불확실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 또한 밝지 않습니다. 욕망의 쳇바퀴를 돌리다가 환멸이라는 복병을 만난 격입니다.

많은 이들이 ‘내 인생이 왜 이 모양이냐?’고 투덜거립니다. 자기 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 원인을 자기 안에서 찾는 이들도 있고, 바깥에서 찾는 이들도 있습니다. 능력주의 사회는 모든 사람을 비인간화합니다. 자신의 노력과 상관없이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기회를 부여받아 승자의 대열에 합류한 이들은 오만에 빠지기 쉽고, 패자가 된 이들은 수치심을 느낍니다. 오만과 수치심은 공히 부정적인 감정입니다. 이 감정에 사로잡힌 이들은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지 못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지금의 세상에 대해 공포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삶의 기회를 박탈당한 것 같은 상실감에 빠진 이들을 자극하여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이들도 있습니다. 흔들리는 터전 위에서 멀미를 하고 있는 이들을 볼 때마다 저는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인 프리모 레비의 말을 떠올립니다. 그는 수용소가 사람을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였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한사코 동물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이현경 옮김, 돌베개, p.58)

그가 비누가 없어도 얼굴을 씻고, 신발을 꺾어 신지 않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걸었던 것은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였습니다. 살아남아 자기가 겪은 것을 사람들 앞에 들려주어야 한다는 소명감 때문이었습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우리에게 남아 있는 ‘한 가지 능력’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세상에 속절없이 이끌려가지 않겠다는 다짐이 그것입니다.

• 광야
오늘은 출애굽 공동체가 겪은 일을 통해 우리 삶을 반성해보려고 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바라보며 애굽을 탈출했지만, 그 꿈이 실현되기까지 그들은 수많은 난관을 돌파해야 했습니다. 홍해를 건넌 후에도 광야를 배회해야 했습니다. 수르 광야, 바란 광야, 시내 광야, 신 광야. 그 광야는 거대한 장벽과 같았습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 밤의 추위와 낮은 더위를 피해 머물 곳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날마다 오직 하루 분의 희망을 얻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은 광야와 같은 고독의 장소를 그리워합니다. 광야는 도피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은 광야 지대를 떠돌았고, 아합과 이세벨에게 쫓기던 엘리야도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광야는 또한 심각한 결단을 앞두고 향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예수님은 광야에 들어가 사십 일을 머무셨습니다. 눈길을 사로잡는 아무런 인공의 구조물도 보이지 않는 곳, 그곳에 머무는 이들은 자기의 한계에 직면하게 마련이고,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을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는 매력적인 장소입니다. 저도 내 인생에 한 번쯤은 사막 깊은 곳으로 들어가 해가 뜨고 해가 지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가 자발적으로 택한 장소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거쳐 가는 장소일 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이런저런 일로 더 이상 세상에 설 자리가 없어 들어간 것이라면 광야는 통과해야 하는 장애물일 뿐입니다. 출애굽 공동체도 가나안에 가기 위해서는 광야를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런 불편쯤은 기꺼이 감내할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불편이 지속되자 생각이 바뀝니다. 아름답고 영롱한 꿈이 퇴색된 자리에 남는 것은 불평과 환멸 그리고 원망입니다. 삶이 힘겨울 때마다 우리는 그 무거움을 전가시킬 사람을 찾곤 합니다. ‘너 때문이야’라고 말할 대상을 고릅니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섞여 살던 무리들이 먹을 것 때문에 탐욕을 품으니, 이스라엘 자손들도 또다시 울며 불평하였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이집트에서 생선을 공짜로 먹던 것이 기억에 생생한데, 그 밖에도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눈에 선한데, 이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 만나밖에 없으니, 입맛마저 떨어졌다.”(민 11:4-6)

불평은 전염성이 강합니다. 절망도 그러합니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섞여 살던 무리들은 가장 덜 주체화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불평을 터뜨리자 이스라엘 자손들도 그 불평에 가세했습니다. 울고 싶은데 뺨을 때려준 격이었을 겁니다. 그들은 애굽에서의 삶을 미화하여 기억합니다. 생선도 공짜로 먹었고, 오이 수박 부추 파 마늘도 맘껏 먹었다고 말입니다.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했던 기억, 사람이 아닌 기계 취급받던 기억, 항시적인 불안과 폭력에 시달리던 기억이 일시 소거된 것입니다. 불평이 급기야는 울음으로까지 번져갔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현실에서 절망만 보고 있습니다. 불평에 사로잡히는 순간 성찰은 불가능해집니다.

• 하나님의 염증
이쯤 되면 아무리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진 모세라 해도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도 지쳤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투덜거립니다.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주님의 종을 이렇게도 괴롭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저를 주님의 눈 밖에 벗어나게 하시어, 이 모든 백성을 저에게 짊어지우십니까? 이 모든 백성을 제가 배기라도 했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기라도 했습니까? 어찌하여 저더러, 주님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마치 유모가 젖먹이를 품듯이, 그들을 품에 품고 가라고 하십니까?”(민 11:11-12) 모세의 투덜거림이 참 절절합니다. 그의 고독이 짙게 느껴집니다. ‘어찌하여’라는 단어가 반복되면서 그의 고통이 선명하게 부각됩니다. 책임 있는 자리에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인 동시에 무거운 짐입니다. 모세도 지쳤습니다. 하나님은 징징대는 백성들에게 고기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백성에 대한 분노가 실려 있습니다. “하루만 먹고 그치지는 아니할 것이다. 이틀만도 아니고, 닷새만도 아니고, 열흘만도 아니고, 스무 날 동안만도 아니다. 한 달 내내, 냄새만 맡아도 먹기 싫을 때까지, 줄곧 그것을 먹게 될 것이다”(민 11:19-20).

이건 풍요의 식탁이 아니라 벌입니다. 주님을 거절하고 애굽을 떠난 것을 후회한 이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단단히 화가 나셨습니다. 마침내 주님께서 바람을 일으키시자 바다 쪽에서 메추라기가 몰려왔고, 진을 중심으로 하여 하룻길 될 만한 지역에 떨어졌습니다. 얼마나 많은지 땅 위로 두 자쯤 쌓이게 하셨습니다. 백성들은 일어나 그 날 온종일, 그리고 밤새도록, 그 이튿날도 온종일 메추라기를 모았습니다. 적게 모은 사람도 열 호멜은 모았습니다. 한 호멜은 당나귀 한 마리가 운반했던 곡식의 분량을 나타냅니다. 어마어마한 분량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진 주위에 널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서 씹히기도 전에, 주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내렸습니다. 극심한 재앙이 그들을 덮친 것입니다. 그 재앙이 어떤 것이었는지 성경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복처럼 여겨지던 것이 화가 된 셈입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기브롯 핫다아와라고 불렀습니다. ‘탐욕의 무덤’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는 풍요라는 환상이 죽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오늘의 우리에게 깨우쳐줍니다. 소비 사회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 이면에서는 생태계의 파괴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안락하고 쾌적한 삶을 위해 우리가 치르는 대가는 매우 큽니다. 유행을 따르고 소비 사회의 신민이 되기 위해 우리는 우리 모두의 고향인 지구를 더럽히고 있습니다. 사회학자인 노명우 박사는 지금 우리 현실을 이렇게 진단합니다.

“체면치레가 유행에 따른 삶이 되고, 수치심이 소비주의에 의해 속류화되면 의인의 자리를 ‘셀레브리티’가 대신한다. 셀레브리티가 먹는 음식, 그들이 꾸민 집, 그들의 자녀 교육 방법, 그들의 노후 대책까지 흉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따라 하면 된다.”(노명우, <세상 물정의 사회학>, 사계절, p.143)

이런 세상에서 텔레비전은 우리에게 시대의 라이프스타일을 알려주는 기숙형 예절학교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기브롯 핫다아와를 지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런 속류화된 이야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에 동참해야 합니다.

• 선택된 백성이 된다는 것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민 즉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교회 다니는 이들도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청년 시절 처음 교회에 나갔을 때 대표 기도하는 분들이 빼놓지 않는 상투어구가 있었습니다. ‘저 죄악된 세상에서 우리를 건져 구원의 방주에 들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버러지만도 못한 죄인인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값없이 사서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기도를 들을 때마다 제 마음에는 반발심이 생겼습니다. 세상을 ‘죄악된 곳’으로 일반화하는 것도 싫었고, 교회를 구원의 방주라고 말하는 것도 싫었습니다. 눈을 뜨고 보니 교회도 세상과 별반 다를 바 없었고 때로는 더욱 더 위선적으로 보일 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버러지만도 못한 죄인‘이라 말하면서도 고압적인 자세로 사람들을 대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고백과 삶 사이의 거리가 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선민이라는 자부심은 정말 온당한 것일까요?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영연방 최고 랍비 조너선 색스는 ’선택된 민족’과 ‘지배자 민족’을 구별합니다.

“선택된 민족은 과업에 의해 규정된다면 지배자 민족은 타고난 우월의식에 의해 규정된다. 선택된 민족은 헌신에의 소명을 느끼지만 지배자 민족은 지배의 욕구를 느낀다. 선택된 민족의 특색을 나타내는 감정은 겸손이다. 반면 지배자 민족의 미덕은 라틴어로 수퍼비아superbia라 일컫는 것, 즉 긍지이다.“(조너선 색스,<사회의 재창조>, 서대경 옮김, 말·글빛냄, p.257)

유대인들이나 지금의 기독교인들이 보이는 태도는 선민의식이 아니라 지배자 의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조너선 색스는 지배자 민족은 승리를 기념하는 건축물이나 기념비를 세우지만, 선택된 민족은 반대로 패배와 결점을 기록한다고 말합니다. 지배자 민족은 승전탑을 쌓고 개선문을 세우고 거대한 예배당을 건축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을 등지고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기록합니다. 성경은 그런 의미에서 자기 비판적입니다. 기브롯 핫다아와에 대한 기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어쩌면 숨기고 싶었을 자기 조상들의 모습을 성경 속에 담아놓은 것은 그 이야기를 반복하면서 자기를 돌아보고 성찰하는 계기로 삼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인간은 타고난 성품, 환경, 사회적 상황에 묶여 살아갑니다. 믿음은 그 사슬에서 벗어나 더 큰 세계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 8:3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상황의 노예가 아닙니다. 그는 그 상황의 인력을 끊고 더 높은 곳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 자리에까지 가지 못한다면 우리의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불평 불만과 환멸 가득 찬 이 세상에서 너는 무엇 위해 사는가?’ 이제 우리가 삶으로 대답해야 할 차례입니다. 참된 자유와 평화 그리고 안식은 경제적인 넉넉함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잇대어져 있을 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탐욕의 무덤가를 서성이며 살기보다는 단출하지만 가볍고 명랑한 삶을 선택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모세를 도와 백성들을 이끌어야 했던 일흔 명의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내려와 머물렀던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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